큰스님   Introducti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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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5대 경허 성우

프린트 홈으로 종정예하 법맥 75대 경허 성우
경허 스님은 1849년 8월 24일 전라북도 전주 자동리(子動里)에서 송두옥(宋斗玉)씨와 밀양 박씨 부인 사이에서 차남으로 출생하였습니다.
처음 이름은 동욱(東旭)이요, 법호는 경허(鏡虛), 법명은 성우(惺牛)이며, 먼저 출가하여 공주 마곡사에서 득도한 백씨(伯氏)는 태허 성원(泰虛性圓) 스님이십니다. 태어난 뒤 사흘 동안 울지 아니하니 사람들이 다 이상하게 여겼습니다.
일찍이 아버지를 잃고, 9세에 어머니를 따라 서울에 올라와서 경기도 청계산 청계사에 가서 계허(桂虛) 대사에 의하여 머리를 깎고 계를 받았습니다.
14세 때 마침 한 선비가 절에 와서 여름을 지낼 적에 여가로 글을 배우는데, 눈에 거치면 외우고, 듣는 대로 뜻을 해석할 만큼 문리(文理)에 크기 진취가 있었습니다. 그해 가을에 계허 스님의 천거로 계룡산 동학사 만화 화상(萬化和尙)을 찾아가 일대시교(一大時敎)를 수료하고, 23세 적에 대중의 요청으로 동학사에서 개강(開講)함에 사방에서 학인들이 구름처럼 몰려왔습니다.
대중들의 요청으로 동학사 강원의 강단에서 강의를 하다가 여름 어느 날, 은사(恩師)스님을 뵈러 가던 길에 폭우를 만나 비를 피하던 중 호열자로 인하여 사람들이 다 죽어가고 있는 현장을 만나게 되었습니다. 여기에서 무상(無常)이 빠르고 생사(生死)가 신속함을 느꼈는데, 밤이 되어 하루 묵을 곳을 찾다가 어느 처사집에 찾아가게 되었습니다.
그 집에서 하루 머무는데 집주인 처사가 경허 스님에게 묻기를,
"스님네들은 일생동안 시주만 받아먹고 살다가 죽게되면 소가 된다는데..."
하는 말에 대꾸 한마디를 하지 못했습니다.
이에 경허 스님은 강원의 강백으로서 모든 학인을 지도하고 부처님의 교리를 원만히 다 안다 하더라도 그것은 생사의 언덕에 큰 힘이 되지 못한다는 것을 알았습니
다. 실로 불교의 깨달음이란 실참실오(實參實悟)해야만 비로소 부처님 지혜에 이를수 있는 것이라고 느끼고 그 길로 동학사로 돌아와 학인들을 흩어보내고 폐문(閉門)한 뒤 좌선(坐禪)을 시작하였습니다.
모든 공안이 알음알이로 해결되어 버렸는데, 영운(靈雲) 선사의 '나귀 일이 가지 않았는데, 말의 일이 도래한다.[驢事未去 馬事到來]'는 법문은 도무지 그 뜻을 알 수가 없어 이것을 화두로 삼고 두문불출하시면서 졸음이 오면 날카로운 송곳으로 살가죽을 찌르고 칼을 갈아 턱 밑에 대놓고서 수마(睡魔)를 물리치며 용맹정진하였습니다.
그렇게 정진하시기를 석달 째, 화두 한 생각이 순일하여 은산철벽(銀山鐵壁)과 같았습니다. 육근육식(六根六識)의 경계가 다 물러가고 화두 한 생각만 또렷해져 있던 어느 날, 우연히 바깥에서 '소가 되어도 고삐 뚫을 구멍이 없다.'는 말이 들려오는 순간, 여지없이 화두가 타파되었습니다. 이 때가 31세셨습니다.
오도(悟道)를 한 후, 송(頌)하시기를,

    忽聞人語無鼻孔 (홀문인어무비공) ....... 홀연히 사람에게서 고삐 뚫을 구멍 없다는 말을 듣고
    頓覺三千是我家 (돈각삼천시아가) ....... 문득 깨달아 보니 삼천대천세계가 다 나의 집일세
    六月燕岩山下路 (유월연암산하로) ....... 유월 연암산 아랫길에
    野人無事太平歌 (야인무사태평가) ....... 들사람 일이 없어 태평가를 부르네.

그리고 선사께서는 이으신 법(法)의 전등연원(傳燈淵源)을 청허 휴정(淸虛休靜) 선사의 12세손(孫)이며, 환성 지안(喚惺志安) 선사의 8세손이라고 밝히셨습니다.
이때부터 제방(諸方)에 선풍을 진작시키니 각처에 선원(禪院)이 개설되고 걸출한 선객(禪客)과 수행납자(修行衲子)들이 처처에서 많이 모여들어 적막하기만 하던 조선의 선불교는 다시 활기를 찾게 되었습니다.
오도 후, 참으로 의발 전할 이 없음을 탄식하시더니, 1885년 선사 세수 37세 때, 비로소 눈 밝은 납자를 얻으셨으니 그 분이 바로 혜월 혜명 스님입니다.
경허 선사께서는 말년(1905년 57세)에 세상을 피하고 이름을 숨기고자 갑산(甲山)ㆍ강계(江界) 등지에 자취를 감추고, 스스로 호를 난주(蘭州)라 하여, 머리를 기르고 유관(儒冠)을 쓰고, 바라문의 몸을 나타내어 만행(萬行)의 길을 닦아 진흙에 뛰어들고 물에 뛰어들면서 인연따라 교화하셨습니다.
1912년 4월 25일, 갑산 웅이방(熊耳坊) 도하동(道下洞)에서 입적하시니, 세수(世壽)는 64세, 법랍(法臘)은 56세였습니다.
시적(示寂) 직전에 마지막으로 일원상(一圓相)을 그린 위에 써놓은 열반게송(涅槃偈頌)이 있습니다.

    心月孤圓 (심월고원) ....... 마음 달이 홀로 둥그니
    光呑萬像 (광탄만상) ....... 그 빛이 만 가지 형상을 삼켰도다.
    光境俱忘 (광경구망) ....... 빛과 경계를 함께 잊으니
    復是何物 (부시하물) ....... 다시 이 무슨 물건이리오.

여름에 천화(遷化) 소식을 듣고 제자 만공(滿空) 스님과 혜월(慧月) 스님이 열반지 갑산에 가서 법구(法軀)를 모셔다 난덕산(難德山)에서 다비(茶毘)하여 모셨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