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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 실로 불교의 깨달음이란 실참실오(實參實悟)해야만 비로소 부처님 지혜에 이를수 있는 것이라고 느끼고 그 길로 동학사로 돌아와 학인들을 흩어보내고 폐문(閉門)한 뒤 좌선(坐禪)을 시작하였습니다. 모든 공안이 알음알이로 해결되어 버렸는데, 영운(靈雲) 선사의 '나귀 일이 가지 않았는데, 말의 일이 도래한다.[驢事未去 馬事到來]'는 법문은 도무지 그 뜻을 알 수가 없어 이것을 화두로 삼고 두문불출하시면서 졸음이 오면 날카로운 송곳으로 살가죽을 찌르고 칼을 갈아 턱 밑에 대놓고서 수마(睡魔)를 물리치며 용맹정진하였습니다. 그렇게 정진하시기를 석달 째, 화두 한 생각이 순일하여 은산철벽(銀山鐵壁)과 같았습니다. 육근육식(六根六識)의 경계가 다 물러가고 화두 한 생각만 또렷해져 있던 어느 날, 우연히 바깥에서 '소가 되어도 고삐 뚫을 구멍이 없다.'는 말이 들려오는 순간, 여지없이 화두가 타파되었습니다. 이 때가 31세셨습니다. 오도(悟道)를 한 후, 송(頌)하시기를, 忽聞人語無鼻孔 (홀문인어무비공) ....... 홀연히 사람에게서 고삐 뚫을 구멍 없다는 말을 듣고 頓覺三千是我家 (돈각삼천시아가) ....... 문득 깨달아 보니 삼천대천세계가 다 나의 집일세 六月燕岩山下路 (유월연암산하로) ....... 유월 연암산 아랫길에 野人無事太平歌 (야인무사태평가) ....... 들사람 일이 없어 태평가를 부르네. 그리고 선사께서는 이으신 법(法)의 전등연원(傳燈淵源)을 청허 휴정(淸虛休靜) 선사의 12세손(孫)이며, 환성 지안(喚惺志安) 선사의 8세손이라고 밝히셨습니다. 이때부터 제방(諸方)에 선풍을 진작시키니 각처에 선원(禪院)이 개설되고 걸출한 선객(禪客)과 수행납자(修行衲子)들이 처처에서 많이 모여들어 적막하기만 하던 조선의 선불교는 다시 활기를 찾게 되었습니다. 오도 후, 참으로 의발 전할 이 없음을 탄식하시더니, 1885년 선사 세수 37세 때, 비로소 눈 밝은 납자를 얻으셨으니 그 분이 바로 혜월 혜명 스님입니다. 경허 선사께서는 말년(1905년 57세)에 세상을 피하고 이름을 숨기고자 갑산(甲山)ㆍ강계(江界) 등지에 자취를 감추고, 스스로 호를 난주(蘭州)라 하여, 머리를 기르고 유관(儒冠)을 쓰고, 바라문의 몸을 나타내어 만행(萬行)의 길을 닦아 진흙에 뛰어들고 물에 뛰어들면서 인연따라 교화하셨습니다. 1912년 4월 25일, 갑산 웅이방(熊耳坊) 도하동(道下洞)에서 입적하시니, 세수(世壽)는 64세, 법랍(法臘)은 56세였습니다. 시적(示寂) 직전에 마지막으로 일원상(一圓相)을 그린 위에 써놓은 열반게송(涅槃偈頌)이 있습니다. 心月孤圓 (심월고원) ....... 마음 달이 홀로 둥그니 光呑萬像 (광탄만상) ....... 그 빛이 만 가지 형상을 삼켰도다. 光境俱忘 (광경구망) ....... 빛과 경계를 함께 잊으니 復是何物 (부시하물) ....... 다시 이 무슨 물건이리오. 여름에 천화(遷化) 소식을 듣고 제자 만공(滿空) 스님과 혜월(慧月) 스님이 열반지 갑산에 가서 법구(法軀)를 모셔다 난덕산(難德山)에서 다비(茶毘)하여 모셨습니다. |